뉴딜 정책
주 정부들은 다양한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추가했고, 이것들을 판매하기 위해 판매세 제도를 시작했습니다. 이념적으로 뉴딜은 흑인과 백인, 노동조합과 블루칼라로 이루어진 뉴딜 연합 덕문에 미국에 현대적인 자유주의를 확립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민주당은 거의 30년 동안 워싱턴에서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뉴딜 연합은 1936년, 1940년, 1944년 대선에서 루스벨트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1935년과 1936년의 두 번째 뉴딜은 바그너 법을 통해 노동조합을 키웠으며, 경제 발전은 미약했습니다. 루스벨트는 그의 프로그램들에 대한 저항의 중심이었던 대법원을 포섭하는데 실패하였고, 그에 대한 신임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제는 1936년까지 본질적으로 회복되었지만, 1937년과 1938년에 걸쳐 짧지만 급격한 경기 침체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장기 실업은 전시 징병으로 해결될 때까지 여전히 사회 문제로 남아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실업 구제 프로그램은 1940년대에 중단되었고, 보수주의자들은 보수당 연합을 통해 다시금 권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루스벨트는 과거 미국의 개입주의를 비난하고, 라틴 아메리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으로 1933년 그 지역에서의 군대를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히스패닉들에게 대공황은 경기 침체로 어려운 시기였는데 멕시코 송환으로 인해 약 40만 명의 멕시코인들과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이주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세계 경제 대공황 동안 미국은 자국내 문제에 집중했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쇠퇴했고, 많은 나라에서 독재자들의 독재 정치가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해 회유를 시도한 반면,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이웃 나라를 정복하게 위해 무력으로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중립법에 있는 미국의 입법은 외국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책은 1939년 9월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침공으로 다시 반 나치 감정과 충돌했습니다.
처음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을 '민주주의의 무기고' 역할을 자처하며 연합국과 임대 계약에 대한 전면적인 군수 및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지만 군사력 지원은 없었습니다. 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했고, 태평양에서 미국의 힘을 꺾어 놓으려 했지만 이는 전쟁에 참전을 원하는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열기는 반일 감정을 고취시키고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억류를 초래했습니다. 루스벨트 행정 명령 9066은 일본계 미국인 약 12만 명을 그들의 집에서 추방하였고, 수용소에 구금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구금된 사람의 3분의 2는 일반 미국 시민이었고, 무려 이들 중 절반이 어린이였습니다.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그 외 다른 국가들)은 유럽에서는 독일과, 태평엥 전쟁에서는 일본과 맞서 싸웠습니다. 미국은 연합국에 전쟁 노력 식량, 석유, 기술, 자금, 그리고 군사력을 제공했습니다. GDP의 40%가 전쟁 비용으로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국내총생산 중가, 실업 종식, 민간 소비의 증가를 일으키며 국가 경제의 부흥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전시 생산량의 증가는 대공황을 종식시켰으며, 수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노동에 임했으며, 더 높은 생산성을 보이는 일자리로 이직하였습니다. 노동력 부족 현상은 여성과 흑인을 위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면서 산업체가 새로운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찾도록 장려했습니다. 경제 동원은 전쟁 생산 위원회에 의해 관리되었는데 대부분의 내구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의류, 육류, 그리고 석유가 보수적으로 배급되었습니다. 산업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인구에 비해 주택의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여 노동자들은 비좁은 공간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격과 임금이 통제되었고, 미국인들은 그들 수입의 대부분을 저축하면서 전쟁 후 미국의 새로운 경제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