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행정부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 대통령은 눈에 띄는 경제 성장을 주도했지만 전례 없는 가장 긴 기간 유가상승을 경험했던 대통령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연방 예산의 균형 잡힌 편성을 위해 공화당 의회와 협력했었습니다. 경제 호황의 가장 큰 부분은 정부 프로젝트의 하나인 ARPANET으로 시작된 디지털 혁명과 인터넷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사업 기회의 제공이었습니다. 1990년대 남부의 백인 민주당원들이 민주당의 지배력을 잃으면서 그 지역은 대부분 민주당이 아닌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체제로 개편되었습니다.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은 1994년 중간 선거에서 미국과의 계약 정책 의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화 혁명'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뉴트 깅리치가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강경한 정치 연설에 참여하기 위해 공화당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1995년 6월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의 정치 색깔을 좌파에서 중도로 좀 더 이동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지지율의 증가폭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4월 오클라호마 시티 폭격 이후 클린턴의 지지율은 급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 1996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1998년 클린턴은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성적 관계에 대해 선서를 했으며, 거짓말을 한 혐의로 하원에 의해 탄핵되었습니다. 그는 상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탄핵의 실패와 1998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강세로 깅리치는 의회에서 사임해야 했습니다.
2000년 조시 W. 부시 주지사와 앨 고어 사이의 아슬아슬한 대통령 선거는 다가오는 정치적 양극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주는 뉴멕시코와 플로리다였는데 투표 결과는 극도로 접전이었고, 개표 과정에 대해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결국엔 부시가 승리했고, 2000년을 포함하여 민주당은 2004년을 제외하고 1992년부터 2020년까지 모든 선거에서 국민 투표 결과 공화당을 앞질를 수 있었습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2001년 9월 11일(9.11) 19명의 알카에다 납치범들이 자살 테러세 사용될 4개의 비행기를 납치했고, 미국은 이들에 의해 테러 공격을 받았습니다. 두 대는 의도적으로 세계 무역 센터의 쌍둥이 타워로 향했고, 세 번째 비행기는 펜타곤을 향했습니다. 네 번째 비행기는 다행히 승객과 승무원들이 되찾을 수 있었지만 펜실베이니아의 빈 들판에 추락하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4대의 비행기 테러로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원하는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 무역 센터의 모든 건물이 일부 또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로워 맨해튼을 유독성 먼지 구름이 뒤덮었습니다. 총 2,977명의 희생자가 이 공격으로 사망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9월 20일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군 해병들은 사담 후세인의 궁전들 중 하나를 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10월 미국과 NATO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고, 알카에다와 빈라덴이 수장으로 있던 탈레반을 축출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빈라덴은 이후 수색망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탈출했고, 미국은 향후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국내 방어책을 구축했습니다. 애국법은 정부가 각종 통신망에 대한 감시 권한을 대폭 증가시켰고, 연방 법 집행 기관 간의 정보 공유에 대한 법적 제한을 없앴습니다. 쿠바 관타나모 만의 미군 해군 기지에 있는 감옥인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국외에서 붙잡은 테러 용의자들을 미국 정부가 무기한 구금했는데 이는 인권 침해와 국제법 위반 혐의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이후 연방 대테러 활동을 주도하기 위한 국토안보부가 창설되었습니다.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의 독재가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이라크 국민들이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라크를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량살상무기를 지원하는 정보는 나중에 잘못된 정보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전쟁은 이라크 정부를 붕괴시켰고, 결국 후세인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침공 초기에는 약간의 성공도 있었지만, 계속된 이라크 전쟁은 국제적인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그 비용만큼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국민들의 전쟁에 대한 지지는 점차 감소했습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스의 제방이 무너지면서 뉴올리언스 주변에서만 약 1,800명의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2007년 이라크 반군에 의한 수년 간의 폭력 사태 이후, 부쉬는 '급진'이라고 불리는 전략에 오히려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망자 수는 감소했지만 이라크의 정치적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